|
서영석 정치전문기자 | 에피소드 1 – 박근혜의 성숙
역시 사람은 어려움을 겪어야 성숙해지나 보다.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이하 인명은 모두 경칭 생략)의 정치적인 운신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행정도시법 통과를 둘러싼 당내 분란을 수습해 나가는 박근혜의 태도를 하나 하나 분석하면서 평가해 보자.
첫째 강공.
일부 당직자들이 연쇄 사퇴하면서 박근혜를 몰아부치자 강공으로 나왔다. “나갈 테면 나가라”란 발언은 강공이다. 아마도 반 박근혜 파들은 움찔했을 것이다. 이런 강공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나 이번 행정도시법 파동에서 명분은 확실히 박근혜에게 있었다.
박근혜로서는 최선을 다해 여야 협상을 했고, 그 협상은 박근혜의 언명대로 “차선을 택한 것”이었다.
당권이나 당의 인기에 별 신경 쓸 필요 없는 비주류의 입장에서야 지난해 말 4대입법 저지과정처럼 물리적 저지에 나섰으면 좋겠지만, 당권을 쥐고 있고 당의 지지도에도 신경을 소홀히 할 수 있는 주류 당권파 입장에서는 쉽게 택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었다.
사실 그때의 물리적 저지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상처를 많이 입었고, 이는 곧바로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물리적 저지보다는 협상을 택한 박근혜는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올바른 선택을 한 셈이었다.
협상을 선택한 박근혜는 당내 의견수렴절차를 밟았다. 의총을 소집해 80명이 참석한 가운데 47명이 찬성함으로써 협상안의 추인을 받았다.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런 하자없는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략일 뿐이다. 실제로 정략이다.
갑자기 의총을 소집했다 뭐다 반 박근혜파는 말들이 많지만, 억울하면 당권을 쥐면 될 것 아닌가. 당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집할 때 소집했고, 반대토론에 나선 십수명의 의견까지 들었으면 할만큼 한 것이다. 명분에서 우위에 있을 때는 강공이 먹혀든다. “나갈 테면 나가라”는 박근혜의 입장에 움찔한 반 박근혜파는 꼬리를 내렸다.
갑자기 박근혜는 아니고…라며 타깃을 김덕룡에게로 돌렸다. 이 작전도 김덕룡이 전격 사퇴를 선언하면서 전선의 붕괴를 가져왔다. 반 박근혜파의 선봉에 선 이재오는 어리석게도 당직자 총사퇴 운운하고 있지만, 그것도 박근혜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야당에서 당직은 일종의 ‘당근’이다. 이번 파동을 통해 충성이 검증된 사람들은 자리만 바꿔서 재임명하면 그뿐이다. 당권파 입장에서 당직 개편이란 다시 새로운 사람을 기용해서 자기 사람을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테스트 하는 시험대 성격을 갖고 있다. 당직 개편이 잦아서야 안되겠지만,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당권파 입장에서는 백배 낫다.
둘째 포용.
반 박근혜파가 일단 움찔하면서 타깃을 김덕룡에게로 돌리고 김덕룡이 전격 사퇴하면서 기선을 제압하자 이번엔 포용책으로 나왔다.
비례대표 의원을 사퇴한 사람들에게도 반려를 요청했다. 단식중인 전재희를 찾아가 목이 메는가 하면, 박세일에게는 서른통이나 전화를 했다.
따지고 보면 뻔한 통수이기는 하지만, 인간사란 빤한 일이라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 수도권 지키기 어쩌구 하는 반 박근혜 파의 온상에 대한 대안으로 수도권대책위를 만들겠다고도 공언했다.
지도자란 모름지기 유리하든 불리하든 원칙을 지켜야 하고, (상대방이) 원칙에 어긋날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며, (상대방이) 일단 꼬리를 내리면 너그럽게 포용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자 ABC다. 하지만 이 ABC를 제대로 하는 정치지도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이번 파동을 통해 박근혜는 한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의원을 120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제1야당의 대표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에피소드 2 - 홍준표의 어리석음
끼리끼리 모여 농담반 진담반의 환담을 나눌 때야 상관없지만, 일단 공식화된 발언일 경우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그런 면에서 홍준표는 어리석음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이다. 홍준표가 기자들에게 행정도시법을 협상한 박근혜에 대해 “과거사법 미루려고 수도를 팔아먹었다”고 한 발언은 한마디로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왜 그런가. 박근혜의 진심 속에 혹 그런 마음이 들어있었다손 치더라도, 박근혜는 밟아야 할 당내 의견수렴 절차를 제대로 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인은 박근혜가 했지만 협상은 김덕룡이 했다.
김덕룡이 뭐가 아쉬워 박근혜의 과거사를 감춰주려고 수도를 팔아먹겠는가. 홍준표의 말이 최소한이라도 정당성을 가지려면 ‘박근혜 = 김덕룡’이란 공식이 성립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증거는 없다. (앞으로는 물론 모를 일이다. 이번 파동이 의외로 김덕룡의 친박근혜 성향을 가속시킬 수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준표는 설혹 그런 의심이 든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만 담아둬야 할 말을 뱉은 셈이다. 어리석다.
게다가 홍준표는 의리를 배신한 격이 돼 버렸다. 박근혜는 포용 차원에서 당혁신위원회를 홍준표에게 맡겼다. 홍준표가 라디오에 나가 당권-대권분리론을 설파하고 다닐 때도 박근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일단 맡겼으니 믿어준 것이다. 그런 박근혜의 뒷통수를 갈겨도 아주 잔인하게 갈긴 셈이다.
홍준표는 한나라당의 재집권 환경을 조성하려면 대권주자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혁신위원장을 맡자마자 당권-대권 분리론을 들고 나왔었다. 이 말은 혁신위에서 아직 임기가 남아 있는 박근혜에게 당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안을 만들겠다는 얘기였다.
홍준표의 당권-대권 분리론은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은 말도 안되는 틀린 얘기다. 나야 한나라당에게 뭐 얻어먹은 것도 없으니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입닫고 있었는데, 말 나온 김에 간단히 설명하겠다.
당권-대권 분리론이란 무슨 얘기냐. 차기 후보와 관련해 박근혜 하나에 목을 매기는 불안하니 후보군을 다양화하자, 그리고 차기 후보를 하겠다는 사람이 당권을 쥐고 있으면 불공정 게임이 되니 당권에서 물러나게 하자, 뭐 이런 얘기로 요약된다.
언뜻 말되는 얘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말 안된다. 왜 말 안되는가. 후보군의 다양화란 무슨 얘기냐. 넓게는 고건이 포함되고 좁게는 이명박 손학규도 차기 후보로서의 가능성이 있으니 이들이 모두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명백한 차기 후보인 박근혜는 당권을 내놓으라, 이런 얘기지만, 말이 안되는 것은 이명박 손학규도 기득권을 갖고 있는 상태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서울시장이고, 손학규는 경기지사다. 손학규는 아직 지지도가 미미하니, 홍준표의 얘기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명박을 위한 얘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명박은 서울시장이다. 서울시장은 차기주자로서 엄청난 프리미엄이다. 엄청난 예산을 갖고 움직이는 서울공화국의 소통령이란 자리가 서울시장이다.
이명박에게는 서울시장이란 프리미엄을 내놓으라 한마디 얘기없이, 한나라당이 전멸 위기에 놓였을 때 당을 구한 박근혜에게는 유일한 프리미엄인 당권을 놓으라는 얘기가 말 되는가. 말 안된다. 홍준표가 그런 주장을 계속한다면 이명박의 끄나풀이란 소리밖에 들을 게 없다.
차기주자가 당권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아야 한다면, 강재섭은 원내대표에 출마해서는 안되고, 40대 기수론의 원희룡은 최고위원을 내놓아야 한다. 그 주장의 근저에 프리미엄 배제란 관점이 존재한다면, 이명박은 서울시장을 내놓아야 하고, 손학규는 경기지사를 내놓아야 한다. 차기를 위한 공정한 경쟁은 그때부터 해도 늦지 않다.
여하튼 말 안되는 주장이긴 하지만,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이 주장이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홍준표 스스로 자초한 화 때문이다. 믿고 당 혁신위를 맡겨준 박근혜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퍼부은 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명박의 끄나풀이란 오명을 안 쓰는 것만 해도 홍준표는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당권-대권 분리론의 적용시기는 천상 내년으로 밀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어리석은 말은 정치적 손해를 야기한다. 홍준표는 1954년생, 올해 만으로 51세다. 나보다 나이로는 세살 많고 연배로는 2년 위다. 사람이 50대로 접어들면 혈기를 벗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홍준표는 40대의 혈기방장한 청춘인 모양이다. 나는 홍준표를 타산지석으로 삼으려 한다.
덧붙인다면 내가 몇번 썼지만, 박근혜의 과거사가 왜 숨기고 은폐해야 할 일인가. 나는 조갑제식의 박정희 찬양에는 절대 찬성하지 않지만, 순수하게 정치적 이해득실면에서 볼 때 박정희는 박근혜에게 최대의 자산이면 자산이었지 부채는 절대 아니다.
서영석 정치전문기자(du0280@dailyseop.com)
|